느려도 괜찮다.

Pray for Itaewon

휘청 2022. 11. 2. 17:13


삶은 언제나 생사에 기로에 놓여있는 것 같다.
1년에 한 번, 중학교 때 친구들과의 모임을 갖는다.
오래된 친구들이기도 하고 모일 때가 됐으니, 우리는 참사가 있기 전 날인 금요일에 만났었다.
약 1년만에 모인 친구들이여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던 중, 나중에 이태원 지구대로 와야겠다 라는 소리들도 하고 할로윈 코스튬 구경도 하고 무난히 흘러갔던 하루였다.

참사 당일, 나는 이태원에 갔었다. 생각해보면 1년에 한 번 가면 많이 가는 이태원을 금, 토 연달아 가게된 특별한 이유는 없다. 그냥 후배가 한 번 도 안가보고 싶다고 해서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갔었다.
이태원에서 가게를 하는 하루 전에 만난 내 중학교 동창은 가게 안에 보이지 않았다. 마땅히 들어갈 자리도 없었다. 같이 온 후배가 “형 사람이 너무 많고, 친구분도 안계시니 다음에 다시 놀라와요” 너무 많은 인파 속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8시쯤 이태원을 뒤로한 채 떠나 왔다.

삶이란 무엇인가, 아마 사고피해자의 대부분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었을게다. 쉽사리 충격이 가시지 않는다.
만약, 놀기 좋아하는 내가 클럽이라도 간다고 그 인파 속에 껴있었다면? 혹시나 친구의 가게에 친구가 있었더라면?
같이 온 후배가 “형 오늘 한 번 놀아봐요!” 라고 했었다면?

기분이 묘하다. 피해자들이 무슨 잘못이 있고, 그런 가능성을 예견조차 했었는가, 만약 예견할 수 있었다면 가지도 않았겠지. 피해자의 가족들은 또 무슨 고통인가,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큰 슬픔이 밀려왔을 것이다.

영화 글레디에이터의 한 장면 중, 막시무스를 풀어주는 노예주인은 암살을 당할 때 이렇게 얘기한다.
“Shadows and dust” 영화 자막은 “삶이여 덧없도다”
였다. 노예상은 죽음을 예견할 수 있었을까, 잠시 생각해 본다.
주변에는 아쉬운 선택을 비롯해 순간의 선택이 생사를 가르는 일들이 많다.

나 역시도 마찬가지다. 더욱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. 라는 마음과 반대로 삶이란 무엇일까, 아둥바둥 산다 한들 큰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한 편으로 든다.
인생이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 하루하루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맞겠지.

사연없는 무덤은 없다 했던가, 날 마다 새로운 뉴스를 접할 때 마다 가슴이 미어진다, 또한 가족들을 잃은 유족들의 슬픔은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.
유족들의 추가피해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.
망자여! 편히 쉬소서!